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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칼럼


    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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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기도든 통성기도든, 두 가지 기도 모두 기도의 한 형태라는 것은 이미 믿음이 있는 분들에겐 자연스러운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우리가 침묵으로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못 들으실 일 없고, 큰 소리를 내어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귀가 아프실리 없습니다. 두 기도 모두 각각의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쓰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통성기도가 아직 믿음이 없는 분들에게 자칫 거부감을 줄 수 있기에 오늘은 그 부분만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기도할 때 소리를 내고 안내고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표현되는 방법일 뿐입니다. 살려달라고 도움을 구해야 하는 사람에겐 부르짖음이 오히려 더욱 자연스럽겠지요. 운동장에서 응원을 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문제는 그 부르짖음의 대상이 실재하느냐일 겁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면 부르짖음 자체가 이상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20세기 초에 전세계를 걸쳐 기독교에 아주 특별한 신앙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1904년 영국 웨일즈 부흥, 1905-6년 인도 카시아 부흥, 1906년 미국 아주사 부흥, 1907년 평양 부흥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참 한이 많고 어려운 상황 중에 지내던 사람들이 소리내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절박한 상황과 감정이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를 낳은 것이죠. 

      그 결과는 놀라왔습니다. 놀라운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술과 마약에 중독되어 있던 사람들, 가난과 좌절의 늪에 빠져 있던 사람들, 인종 차별의 희생양이 되었던 사람들, 병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와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우리 민족만 하더라도, 전쟁과 가난으로 한이 참 많은 민족이었지요.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울었습니다. 교회와서 부르짖어 기도하며 맘껏 울고 웃고, 이 세상 어디서 받을 수 없는 위로와 평안과 담대함을 얻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그런 기도를 ‘나쁘다, 교양없다, 광신적이다’라고 평가할 수는 없겠지요. 오히려 그들에게는 부르짖는 기도가 더 자연스러운 기도였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의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의 열심과 집중력 있는 기도는 분명 역사하는 힘이 컸습니다. 덕분에 우리 한국 교회는 통성기도의 영성을 이어받았습니다. 사용하는데 지혜와 절제도 필요할가 있지만, 저는 그 자체는 참 감사한 일이고 지켜야할 소중한 신앙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기도가 하나님과의 교제임과 동시에 영적인 싸움의 방법이고 기도의 내용에 선포가 담기기도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소리내어 하는 기도의 맛을 더 알 수 있을 겁니다. 태권도를 하는 사람은 기합을 크게 넣는 게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겠지요. 기도를 크게 하는 것이 때로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과 믿음에 도움이 됩니다. 

      저희 교회는 주일 대예배에서는 작게 기도합니다. 주변분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작게 기도하거나 침묵기도하는 것에도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 성도님들 대부분은 ‘기도하자’고 하면 조용히 기도하시는 분들입니다. 개인적인 성향도 영향이 크겠지요. 그래서 저는 의도적으로 매달 한번 있는 토요기도회에서는 성도님들에게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스타일의 기도 모두 하실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최지원 목사 드림